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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마티카 앤 라이프] 식물과🌿 잘 살아갑니다

2024-06-04

아로마티카 앤 라이프 3호. HOME

식물과🌿 잘 살아갑니다 


초록빛으로 물드는 삶



새벽 공기가 꽤 차가워졌다. 아직 어둑한 베란다를 둘러본다. 따뜻한 이불 속에 있다 차가운 공기를 마주하니 손발이 시리다. 왼손엔 잠옷 소매를 끌어당겨 그러쥐고 오른손으로 양철 물뿌리개를 들고 화분에 조르륵 물을 준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고민하다 물을 주지 않았던 식물들 을 떠올린다. 출근 전에 한 번 더 둘러보고 나가자. 


아침 7시쯤 다시 베란다에 들어서니 가늘고 투명한 겨울 햇살이 창 가까이에 자리한 식물들에 손을 뻗는다. 밤 사이 창을 향해 새 줄기를 틔워낸 한련화 잎에 가장 먼저 닿는다. 동글동글한 잎 테두리를 따라 햇살이 반짝거린다. 베란다 깊은 곳은 아직도 푸른 새벽이지만, 오래가지 않 을 것 같다.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햇살이 닿는 이파리들이 늘어나면서 반짝임을 더해간다. 가장 안쪽에 있던 청나래 고사리에 햇살이 닿고 나서야 장면이 멈추고 거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우연히 목격한 근사한 장면 덕에 들뜬 기분으로 집을 나선다. 이번 겨울의 기억 속 필름에 한 컷이 늘었다. 



늘 같은 햇살, 바람, 식물은 없다. 매일 달라지는 경우의 수들이 모여 새로운 장면이 만들어진다. 예전이라면 의식 하지조차 못했을 것들이 자연스레 내 시야에 들어온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오랜 조적벽에 자리한 담쟁이는 붉은 색이 짙어졌고 조적 벽 너머 자리한 감나무에 남겨진 까 치밥엔 손님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있다. 길 한편에 쌓였던 낙엽들은 바람에 들뜬 듯 둥실둥실 떠다닌다. 이렇게 소소한 것들이 오늘의 장면을 만들고 내 일상 곳곳에 붙어 행복의 원천이 되어간다.


식물과 함께한 지 올해로 5년이 되었다. 이전의 나는 어땠더라. 나를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퇴근을 하면 늘 알 수 없는 공허함에 휩싸였다. 바쁘게 살았지만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는 하루.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시간만 빠르게 흐르는 듯한 기분은 나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일과 삶 사이에서 나를 지탱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식물을 맨 처음 구매했던 때도 겨울 즈음이었다. 퇴근 후 대형마트에 들렀다 에스컬레이터 옆 작은 공간에 자리한 식물 가게에서 미니 콩고 화분을 보았다. 푸석한 얼굴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작은 잎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홀린 듯 식물 가게로 들어갔다. “저 하얀 화분에 있는 식물 을 구매하고 싶은데, 잘 안 죽나요? 제가 식물을 처음 키워 봐서요.” 식물 가게 주인은 잘 안 죽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는지 빛이 잘 안들어오는 장소에 두어도 괜찮고 물은 일주일에 한 번씩만 주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집에 데려온 미니 콩고는 마트 조명 아래에서보다 조금 덜 반짝거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초록빛 하나 없는 하얗고 건조한 내 방에서 미니 콩고는 유독 빛나 보였다. 식물 가게에서 뿌린 잎 광택제 덕이었겠으나, 그때의 나는 그걸 알 턱이 없었고 그저 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는 사실이 좋았다. 잎 한 장, 두 장… 늘어나는 잎을 바라보며 점차 호기심과 애정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삶에 식물을 들이면서 이전보다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을 받지만, 이젠 불안하지 않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착실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식물의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며 안식을 얻는다. 



일직선이 아닌 순환하는 삶. 오늘의 행복이 모여 미래의 장면이 된다는 걸 알고 나니 지난 일을 되돌아보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 되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식물은 매일 조금씩 자란다. 정체되지 않는 그들의 삶은 나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내 삶은 점차 식물과 함께하는 의미있고 평온한 여정이 된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들은 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시간은 무언가를 자라게 하고 해마다 아름다움을 조금씩 더한다. 신의 가호로 고맙게도 우리는 또다시 한 해 더 앞으로 나아간다.” 좁았던 나의 세계가 식물과 함께하며 확장되는 과정이 즐겁다. ‘다음 계절에는, 내년에는…’ 늘 달고 사는 이런 말들엔 매년 찾아오는 익숙한 것들에 대한 기다림과 새로운 것들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있다. 내가 식물을 키우듯 식물도 나를 키운다. 두 삶이 같은 선 위에 놓이고 오늘도 조화롭게 흘러간다. 


에디터: 선요 (@ju_seonyo )

작은 정원을 가꾸며 식물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식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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